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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홍섭 "운명처럼 시민운동에 참여했죠"

by goldcham 2009.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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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시민운동에 참여했죠"
[차세대인물]금홍섭 대전참여자치연대 사무처장,"시민운동 새 돌파구 필요"
2009년 05월 04일 (월) 09:54:13 김중규 jkkim56@nate.com
   
금홍섭 대전참여자치연대 사무처장은 시민운동의 길로 접어든 걸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지에서 들어온 언어 가운데는 ‘외국어’와 ‘외래어’가 있다.
두 단어의 차이는 크다. 외국어는 말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 현재 사용되는 언어다. 영어, 일어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외래어는 좀 다르다. 외국에서 사용된 말이기는 하나 지금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린 말이다. 포르투칼어에서 유래된 ‘빵’이라든가 영어의 ‘타이어’, 독일어 ‘아르바이트’ 등이 있다. 분류의 기준은 동화여부이다. 대화 도중 외국어를 많이 사용하면 잘난척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외래어는 아무리 많이 써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외지식물’과 같다고나 할까.

금홍섭은 대전에 ‘외래어 같은 사람’이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금처장(42)은 경북 안동 출신이다. 외지인이 대전에 와서 미주알고주알 훈수를 두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웃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꺼풀 만 벗기고 들여다보면 그는 완전한 대전맨이다. 누구보다 대전에 애정을 많이 가졌고 대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시민운동의 중요한 부분인 참여자치시민연대에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후원의 밤을 개최하고 난 후 회원들과 함께 한 기념촬영.

그래서 금처장과 대화에서 ‘뿌리’는 가장 먼저 언급됐다.

“안동에서 경일고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을 가야겠는데 제가 관심이 있는 곳은 지역사회개발, 이 분야였죠. 대구와 대전 한남대, 두 곳에 이 학과가 있더군요. 당시 대전에는 삼촌이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대전으로 오게 됐죠.”

그게 1987년도이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대통령 직선제와 시국사범 석방 등을 요구하는 민주화 열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즈음이었다. 이른바 ‘6.29선언’으로 불리는 민주화 조치는 공교롭게도 시민운동의 도약과 맥을 같이한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단체와 여성조직 중심의 시민운동에서 참여민주주의 및 환경, 그리고 시민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 바로 1987년에 시작된 것이다. 그 해 그는 대전에 왔다.

한남대에서 동아리 활동하면서 도시빈민, 공동체 문제에 관심

“한남대 지역개발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도시빈민문제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대학을 다니면서 갖게 되었습니다. 박서호 교수님이 많은 영향을 주었죠. 학회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책도 많이 읽고 현장도 직접 나가보고 그랬습니다.”

대학 4년을 이렇게 보내고 금처장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진로가 문제였다. 시민운동이라는 개념이 스스로에게 명확하지 않았고 장래도 생각해야 할 그런 사안이었다. 이 때 환경운동연합에서 공채로 직원을 뽑는 걸 정말 우연히 보았다. 그게 운명이 되었다. 대전에 사무실이 있는 것도 몰랐다. 무조건 서울로 갔다. 1994년도 였다.
   
대전5개구청 의원들의 해외연수 실태를 꼬집는 기자회견.


“시험을 보러갔더니 대전에도 환경운동연합이 있으니 무조건 거기로 가라고 합디다. 1년 전에 대전조직을 만들었던가봐요. 당시 기독교엽합봉사회관에 위치한 사무실로 가니 광식이 형(김광식 전 조폐공사 감사)하고 김종남씨(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이렇게 두 분이 있더라고요. 그 옆 사무실이 기독교 교회연합회였는데 이충재 총장이 있고요.”

거기서 그는 전격 스카웃(?) 됐다. “같이 일해보자”는 말에 “알겠습니다”가 전부였다. 거기에서 민들레 생협 민명수 선생님과 박재묵 충남대 교수, 송동호 변호사 등이 환경운동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시민운동 1세대로 불리는 분들이지만 열정과 사명감으로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진로 고민 중 환경운동연합 공채 응시, 운명이 돼

“환경운동연합에서 딱 1년 있었어요. 물한계곡 개발 반대운동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광식이 형 차가 프레스토였는데 그 무더운 날 그 차 타고 거기를 오갔던 생각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때 막지 않았으면...주민들이 개발하지 않아야 된다고 한 점이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그 즈음 ‘올바른 지방자치 실현을 위한 시민모임’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나름대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정책전문가 위주로 되어있다 보니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보였다. 마침 서울에서 참여연대가 창립되었다. 대전에서도 이런 조직이 하나쯤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기 시작했다. 시민의견을 대변하고 이해와 요구를 공식적으로 얘기해 줄 수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충재 목사가 사무총장을 맡아 실무 책임을 지고 금홍섭이 그 밑에서 일하는 것으로 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처음 인연이 된 거죠. 첫 사업이 95년 선거였죠. 풀뿌리 지방자치를 위해 선거에 참여하자는 쪽이었죠. 그래서 무소속으로 13명을 후보로 냈죠. 대단한 실험이었는데 모두 4명이 당선됐어요. 연구단지 연구원 1명을 포함해서 서구의회 김용분 의원 등이죠.”

95년 지방선거, 참여자치운동 생태환경 조성

95년 지방선거는 참여자치의 생태환경을 조성해주었다. 다양한 사회참여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실제로 참여를 통헤 얻은 시사적인 교훈이 운동 당사자들을 고무시켰다.
   
1인 릴레이 시위를 하고 있는 금처장.


금처장은 참여자치 시민운동이 이 지역 지방자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일을 해냈고 뚜렷한 궤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앞서간 선배들의 흔적이 자랑스럽고 그것이 큰 힘이 된다고 강조했다.

“대전에 정말 훌륭한 인재들이 여기 이 조직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게 자긍심을 가져다주었지요.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과거 그 분들이 대표도 되고 실무책임도 맡고 그러죠. 그 분들을 볼 때 마다 시민사회가 외적인 성장 못지않게 질적으로 커질 수 있도록 견인해준 분이라는 생각은 늘 가지죠.”

그는 경북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에서 금상원씨(71)와 정월순여사(68) 사이에 5남매 중 3째로 외아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시골에서의 외아들 선호는 생각보다 극성스러웠다. 내성적이고 말이 없었다는 그의 말대로 어린 시절 성격형성은 주변 환경이 크게 좌우한다. 지금도 보리밥을 먹지 못할 만큼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곱게 컸다. 밥을 하면 할아버지, 아버지, 금처장 순으로 퍼주었다. 흔히 고등어 부위를 가지고 장남과 외아들의 신분을 얘기하는데 머리 다음 가장 맛있는 부분이 그의 차지였다. 귀하게 컸다는 말이다. 임동초, 임동중을 다니면서 성적은 ‘고만고만’했다.

“꿈은 화가였죠. 그림도 좀 그렸고...고2때까지 미술선생님이 ‘너 그림 계속 그려라’라고 할 정도였죠. 사실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아버지가 못그리게 했어요. 그때만 해도 순진해서 아버지가 못하게 하시면 하면 안 되는 줄 알았죠.”

순둥이로 자란 어린 시절, 귀한 집 자손으로 성장

그야말로 ‘순둥이’였던 모양이다. 말썽도 안 부렸고 시키는대로 꼬박꼬박 했다. 그러니 매맛을 일도, 혼 날일도 없었다. 가끔씩 엄하게 자란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있는 둥 없는 둥’하는 아이가 어린 시절 금처장의 모습이었다. 그런 성격이 사회운동을 하면서 적극적이고 매사 집요한 쪽으로 바뀌게 됐다. 사회문제는 의리,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그는 30살 먹은 장년에게 월급 100만원을 주고 일을 시키고 말없이 따르는 걸 단적인 증거로 제시했다.

아내 김진화씨(43)와는 시민운동 커플이다.
공장이 많은 대전시 대덕구 대화동 소재 근로복지회관에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둘 사이에는 아홉 살짜리 아들 시훈 군이 있다. 청소년시민연대에서 함께 활동을 하고 환경운동연합 때부터 줄곧 같이 일 해왔다. 동료로서 인정을 했을 뿐 미래의 아내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98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결혼은 2000년 5월에 이뤄졌다.
   
아내 김진화와 아들 시훈군과 함께.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시민운동을 하다 보니 동질감이 생기고 둘이 눈이 맞은 거죠. 99년도 10월부터 관심을 가졌다가 이듬해에 전격 결혼을 하게 됐죠.”

아내 김진화씨는 배재대 독문학과를 나와 대전대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두 사람이 벌지만 웬만한 집 한 벌이만도 못하다. 그래서 금처장은 시민운동을 하려면 ‘우리처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쪽에서 재정문제를 해결할 정도가 되어야 마음 놓고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가치관과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오늘날 시민운동가의 그늘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제가 한 길로 가는 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아들한테... 아들이 어제 편지를 썼는데 아빠에 대한 불만 중에 가장 큰 것이 ‘너무 늦게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애가 그런 걸 쓸 정도이니 제 사생활은 거의 없는거냐 마찬가지죠.”

함께 놀아줄 시간 없는 아들에게 ‘미안’

지난 해 사무처장을 맡고부터는 더더욱 개인시간이 없어졌다. 공식적으로 얼굴을 비쳐야 할 곳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조직에 인사치레로 가야할 곳이 있고...그러다보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한밤중 귀가가 되어버렸다. 주말에는 ‘가정에 충실한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일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얘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참여자치운동 약 14년. 그동안 힘들었던 일도 있었을 것이고 보람 있는 활동도 있었을 터.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민운동의 정의는 ‘대체로 탈 계급적 주체가 공공선을 확대하기위해 개혁의 방법을 통해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사회운동’이다. 계급적 주체가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체제 변혁을 목적하는 민중운동과는 대비된다. 그야말로 시민의 힘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다. 대표적인 게 어떤 것일까.

“총선시민연대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결국 한국의 정치풍토를 변화시킨 게 이 활동이었지요. 공천에서부터 정당이 신경을 쓰도록 한 점이라든가 낙선 후보를 선정, 실제로 시민운동을 통해 그들을 떨어뜨리는 예 등은 길이 남을 업적이라고 봅니다. 이 밖에 지역에서는 도시 교통문제, 경륜장 건설 등등이 있죠.”

금처장은 부산의 예를 들면서 1년에 100억원씩 적자가 나는 걸 확신을 가지고 막았다는 말을 덧 붙혔다. 말하자면 그 때 그걸 못했다면 대전시에 엄청난 재정적인 부담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뜻이다. 아무튼 사업 성격도 그렇고 설사 이익이 나더라도 돈의 성격 자체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좋은 활동이 양지라면 음지도 분명 있다.
   
평소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금처장이 직접 그린 커리커처.


“시민운동이 다양한 훈련의 장이 되고 활동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발판 마련을 위한 중간 단계정도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야 우리 사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사실 시민운동이 출범 초기보다 신선도도 떨어지고 시민 호응도 크게 감소했다. 이 상태로 가면 사회의 섬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일정 부분 보수층의 의도적인 공격으로 흠집내기 탓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시민단체의 책임이 더 크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지금이 위기이고 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 신뢰회복과 재도약이라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다.

시민운동, 신선도 떨어져 새로운 돌파구 마련 필요

“의제 설정 문제, 내부의 도덕성, 그리고 무분별한 프로젝트 위주의 활동 등이 시민운동 전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면도 있었고... 그런 면에서 반성을 해야 합니다.”

금처장은 돌파구를 대중화, 전문화, 진보성 강화에서 찾았다.
시민운동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정체 또는 퇴보되고 있으나 그것을 어디까지나 내부동력을 잃은 탓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시민들 속으로 파고드는 의제를 설정해서 대중화를 이루고 높아진 시민 의식에 맞추기 위해 보다 전문성을 띤 대안 제시를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내세운 진보성 강화는 시민운동 세력들이 항상 갖추어야 할 과제로 대중보다는 한발 앞 선 사고와 행동을 요구하는 일이라 하겠다.
   
적은 돈을 주면서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일해야 하는 직원들에게 늘 미안함이 있다.

쉽지 않는 여건 속에서도 그는 참으로 평범한 좌우명을 도덕적 가치관으로 삼고 있었다.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자’ 이게 생활모토였다. 가족이 생기고 처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니 좀 더 열심히 일을 해야 양쪽을 다 아우를 수 있다는 생각이 만들어 낸 기치다. 술은 대대로 못하는 집안이지만 후천적으로 소주 1병 정도는 마신다.

약 2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중간에 점심도 함께하고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식구들과 사진 촬영에도 응했다. 금처장은 ‘이런 친구들을 100만원씩 주고 쓰려니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진심어린 말이었다. 하긴 금처장 선배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시민운동가들의 얇은 월급은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었다. 아마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이 전통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연락처)010-3419-0092, 042-331-0092

   

[내가 본 금홍섭]"뜨거운 가슴 가진 사나이"

                             한국일보 전성우 차장 

 

금홍섭 사무처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그가 참여자치대전시민회의 간사로 일할 때로 기억된다. 기자와 시민운동가로서 대전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어느새 강산이 한번 반쯤 변할 만큼 지났다.

그 사이 그는 간사에서 사무처장으로, 총각에서 남편과 아빠로 ‘위상’이 달라졌지만 내가 볼 때 ‘속사람’은 변한 것이 없다. 20대 청년의 소신과 열정이 40대가 되어서도 사그라지지 않고 외려 더 푸르른 것 같아 내심 부럽기도 하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시민운동가의 모습을 금 처장에게서 본다. 그의 이념과 지향은 분명하고 감시와 비판은 날카롭다. 자칫 건조하고 비인간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람과 공동체를 향한 따스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늘 메마르지 않고 생명력과 포용력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형님 문화’를 싫어하지만 그의 텁텁한 “형님” 소리는 그래서 듣기 싫지 않다.

가끔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면 자치와 분권, 보건복지, 시민운동, 인권과 평화 등 다양한 의제들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가치 있는 자료를 만나게 된다. 특히 대중교통에 있어서 그는 전문성을 갖추고 현실적이며 대안적인 정책들을 생산해내는 아이디어 뱅크다. ‘보행권’ ‘시내버스’ ‘지하철’ ‘교통일반’ 등으로 분류된 그의 블로그는 교통분야에 대한 그의 관심과 노력을 잘 보여준다.

대전토박이보다 대전을 더 잘 알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금홍섭, 그의 ‘늘 푸른’ 시민운동을 계속 지켜보며 응원해주고 싶다. 대전이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성숙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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