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2000년대 전후 대전산내민간인학살진상규명 과정에서 심규상 님이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취재하였던 글을 재정리한 글임을 밝힙니다.
대전산내 골령골에서 자행된 민간인들에 대한 참혹한 학살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이어진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차 학살에서는 모두 1,4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나무에 묶여 눈을 가린 채 총될 되었으며, 2차 학살은 7월 3일부터 5일까지 총 1,8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1차 학살과 비슷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이었던 에드워드 중령이 워싱턴 미 육군 정보부에 보낸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이라는 보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대전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 개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대전형무소에는 여순사건, 제주 4.3 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들로 포화상태였다. 정원 1천2백 명 시설에 3배가 많은 4천여 명이 들어차 있었다. 6.25 당시 법무부 교정국 산하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원이었던 김형식 씨(75. 대전거주)는 “대전형무소에는 4천 명 정도가 수감돼 있었고 일반범 2천여 명은 전쟁이 일어난 얼마 후 석방했다”라고 말했다.
1970년 4월 1일부터「중앙일보」에 연재된 「민족의 증언」에 따르면 국방부 정훈국장인 이선근 대령은 50년 7월 1일 새벽 대전 충남지사 공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대전형무소에 있는 2천여 명의 적색수감자들”이라는 증언을 했다. 당시 대전 성남장 호텔주인 김금덕 씨도 “내가 알기에는 여순반란의 군죄수들이 2천여 명가량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해 당시 사상범이 2천여 명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4천여 명의 수감자가 있었고 이중 2천여 명이 사상범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상범들은 4.3 항쟁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남로당원, 전쟁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월 1일 새벽, 북한군의 대전공습이 있다는 설이 퍼졌다. 정부각료, 지도급 인사 등 모두가 허겁지겁 도망가기에 바빴다. 형무소에도 정치범을 처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행히 이날 저녁, 폭격설이 오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망가던 인사들이 되돌아왔고 형무소는 평정을 되찾았다.
아래의 내용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직후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모를 심규상(현 오마이뉴스 기자)씨가 취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재정리해 놓은 것이다.
2.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7월 초 대전형무소
각 감방은 여순사건, 제주 4.3 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들로 포화상태였다. 일반수를 합쳐 정원 1천2백 명 시설에 3배가 많은 3-4천여 명이 들어차 있었다. 사상범들은 약 2천여 명으로 4.3 항쟁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남로당원, 전쟁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광복 이후 좌익활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 원 등이었다.
1950년 7월 5일 아침에 헌병대가 형무소를 찾아왔다. “빨갱이 새끼들 다 내놔” 이들은 다짜고짜 여순사건 관련자와 정치범들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처음부터 그들은 정치범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맡겨 놓은 짐짝을 내놓으라는 투였고 매우 고압적이었다.
1950년 7월 5일~6일경 헌병대의 S중위가 와서는 계엄군에 맡긴 예치수(군에서 관할해 형무소가 신병만 위탁관리한 재소자. 주로 여순사건과 4.3 항쟁 관련자를 지칭-편집자 주)들과 정치범들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그들은 툭하면 ‘말을 안 들으면 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부대장이었던 이준영(77)씨의 증언이다.
이 씨는 주춤했다. 정치범을 처리하려는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명령을 그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이 씨는 형무소를 빠져나와 형무소장 직무대리가 된 이순일 씨와 함께 대전 검찰청 관사로 내달았다.
그곳에 머물러 있던 이우익 당시 법무부장관을 찾아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군 명령에 따라야 할지…” 그러나 장관의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지금 계엄령하 아닌가. 지금은 계엄하 전투 중이니 요구대로 내어주라. 단, 군의 명령에 따르되 나중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나를 만나 사전에 상의했었다는 말은 말아주게…” 결국 수 천명의 목숨이 이렇게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상대는 장관이었고 우리는 5급 공무원에 불과했죠. 울분을 씹으며 나올 수밖에요…”당시를 회상하는 이준영 씨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1950년 7월 6일~7일 살기 띤 군 헌병대가 형무소를 에워싼 가운데 교도관들은 명적계(인명부)를 보고 정신없이 재소자들의 성향 분류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분류는 석방(일반수)과 총살(사상범)로 나눠졌다. 일반수의 선별기준은 15-20년 실형 선고자를 제외한 재소자들이었고 나머지는 사상범이었다. 사상범은 10년 이상을 기준으로 했으나 적용된 법령이 국방경비법, 특별조치법, 포교령 위반죄 위반인 경우 기결과 미결, 잔여 형기 등에 관계없이 모두 사상범 반열에 올려졌다. 삶과 죽음의 운명은 이렇게 결정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순일(92. 당시 대전형무소장 직무대리)씨는 지난 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수석간수로서 몇 차례 법원장과 검사장을 찾아갔으나 재소자 처리지침과 분류 기준을 하달받지 못했다. 분류작업은 백소령이 신분장을 보고 석방 가부를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이 씨는 이어 “당시 상황상 억울한 죽음이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 특별경비대원이었던 김형식 씨(75)는“50년 7월 10일께 소장실에서 재소자 신분장을 갖고 분류를 했다. 전황이 불리하고 긴박한 상황이라 신분장을 정확히 읽어보거나 재심할 여유가 없었다”
이준영 씨는 “사상범으로 분류된 재소자들은 여순사건 관련자가 많았고 사상이 무언지도 모르고 잡혀온 보도연맹회원이나 예비검속자들도 적지 않았다. 미결수들도 많았다. 6.25 이후에 잡혀온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한편 대전형무소에서 분류작업이 벌어지던 같은 시간, 학살 현장이 된 당시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에서는 동원된 부역자들과 의용소방대가 시체를 묻을 구덩이 파기에 여념이 없었다.
1950년 7월 8일 아침에 형무소 직원들이 정치범들을 한 명씩 트럭에 실었다.
가석방, 가출옥시킨다며 불러내서는 곧바로 헌병대의 손에 넘겼다. 헌병들은 이들을 2명씩 등을 맞대게 한 다음 광목으로, 전깃줄로 팔을 묶었다. 눈도 가려졌다.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졌다. 카빈소총을 든 헌병 4명이 트럭 네 귀퉁이에서 이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섰다. 무릎이 꿇린 채 트럭바닥에 엎드려졌다.
트럭에 오르는 순간 정치범들은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살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서는 안될 길임을 감지한 이들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헌병들은 움직임 때마다 개머리판과 총구를 마구 휘둘렀다. 여기저기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 대전형무소 경비대원이었던 김 모 씨는“죄수들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는지 몸부림이 심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라고 당시를 생생히 떠올렸다. 헌병들은 이후에는 정치범들을 아예 배추포기 쌓듯 겹겹이 포개 실었다.
줄곧 골령골이 있는 낭월리 마을에서 살아온 임선기(77)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골령골로 들어가는 트럭마다 사람들이 겹겹이 포개 실려 있었어. 군인들이 꿈틀거린다고 총끝으로 내리찍고 무작스럽게 두들겨 패더라고. 하두 포개 실어 놨으니 몇 명이 탄지도 모르지… 울타리 틈새로 그걸 봐 노니께 무서워 살 수가 있나, 하두 무서워 방문까지 걸어 잠갔어”
다음은 당시 도경찰국 사찰주임으로 대전형무소학살사건의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씨가 지난 9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의 증언, “그들은 형무소에서 나오기만 하면 벌써 넋이 빠져 있었어요. 눈을 가린 채 전깃줄로 굴비 엮듯 몇 사람씩 묶어 트럭에다 2중, 3중으로 실었습니다. 나중엔 시간이 없어 트럭 적재함에 쭈그러뜨리고 앉히면 위에 또 얹고 차곡차곡 싣고 왔습니다. 꼭 콩나물시루같이 죄수들을 싣고 총살집행장으로 끌고 온 거지요”
이들은 대전형무소가 텅 빌 때까지 꼬박 3일간 정치범들을 실어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당시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 (골령골에) 도착해서 내리라고 하면 앞이 안 보이니까 못 내렸어요.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발로 차면서 끌어내리면 돼지새끼 구르듯 굴러 떨어졌죠”
변홍명 씨의 증언은 이어진다. 변 씨에 따르면 총살 집행장에는 경비헌병이 능선을 둘러 서 있었고 미군과 사회유지들도 포진해 있었다. “처음에는 7미터 전방에 기둥을 박아놓고 정치범들을 매달아 세운 다음 사격했습니다. 사형목인 기둥 10개를 박아 놓고 사형수는 눈을 가리고 뒤에서 손을 묶었습니다.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M-1 총을 발사하면 총에 맞은 사형수는 고개를 푹 떨구었습니다. 그러면 뒤에서 지휘자가 확인사살을 해요. 뒤이어 소방대원이 손을 풀고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던져 50-60명씩 차면 화장을 해요”
당시 산내초등학교 6학년인 김 모 씨(63)는“산내 국민학교가 휴교하던 날, 친구 2명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 총소리가 나고 연기가 피어올라 등성이에 숨어서 보니 연기가 새까맣게 나고 사람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첫날은 장작이 실려오고 다음날부터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실은 차가 계속 들어왔다. 다리가 묶여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당시 형무소 특별경비대원을 했던 김형식(75)씨는 현장까지 정치범을 인계하러 갔다가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헌병과 경찰이 3백여 미터에 이르는 2개의 구덩이 앞에 재소자를 1열로 줄 세웠어. 그리고는 번갈아 가며 실탄 2발을 뒷머리에 쐈지.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당시 책임자였던 심중위하고 정경감이 권총으로 확인사살 하고 구덩이에 묻는 작업을 하루종일 하더라고”.
“한 번은 내가 정경감에게 신분장을 넘겨주니까 정경감이 트럭에 타고 있던 재소자 1명의 이름을 따로 불러 끌어내리더라고. 아,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일본도를 빼서는 그냥 한 번에 내리쳐 죽이더라고” “2명씩 묶은 사상범을 트럭에서 구덩이까지 데려가는 일은 방위대원 2-3명씩 맡아했어. 안 죽으려고 몸부림하고 발버둥을 치는 죄수들도 있었어. 그러면 심중위가 방위대원에게 똑바로 하라고 권총을 겨누거든. 방위대원들이 혼이 빠져서는… 원 못 볼걸 본 거지” 당시 상황을 전하는 김 씨가 소름이 끼치는 듯 몇 번씩 몸을 움츠렸다.
다시 변홍명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총살집행은 한쪽에서는 헌병들이, 다른 한쪽에서는 사찰형사들이 2개 구덩이씩 나눠했습니다. 처음에는 홍중위가 지휘하는 것을 구경만 했습니다. 사수들이 사격준비가 끝나면 구령에 맞춰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사격을 하면 골이 튀어나와 사수의 온몸에 튕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 나지요” “사수가 물러나면 양쪽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단총으로 다시 확인사살을 하고… 그리고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또다시 확인을 합니다. 그다음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소방대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시체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요. 그 후 기관단총 사수가 다시 두 번을 왔다 갔다 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2차 확인사살을 합니다”.
“총살집행은 하루종일 그 구덩이가 가득 찰 때까지 집행했습니다. 구덩이가 차면 소방대원들이 매장을 하게 되는데 주위는 온통 피 반 흙 반이었어요. 아무리 흙을 덮어도 발이 툭툭 불거져 나와요. 그 위에 자꾸 흙을 덮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더라고요”.
“소방대원들이 다시 흙을 제치고 사수들이 가서 소리가 안 날 때까지 M-1으로 마구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M-1으로 쏘고 기관단총을 쏘고, 다시 권총으로 쏘고.. 철두철미했습니다.” “정말로 산내면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대상자들 중엔 20세 미만 아이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학살 현장에서 구덩이를 파는 부역을 했다는 김종섭(82, 낭월동)씨“대한청년단 청년들이 ‘악질분자를 묻어야 한다’고 해서 끌려가서 구덩이 파는 부역을 했어. 한 이틀 동안 내 키 높이 정도의 구덩이를 길게 팠는데 넓이는 양팔간격보다 좀 컸지 아마. 군인들이 죄수들을 트럭에 태우고 왔고 총살하고.. 에이 못할 짓이었지…” 김 씨는 몸서리가 쳐 다음 날 새벽, 마을을 빠져나와 도망질을 했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학살은 8일 아침부터 10일 저녁까지 3일간 계속됐다. 당시 대전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 씨는“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어 갔는데 2-3일간 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증언은 50년 당시 대전형무소를 지켰던 직원들로 구성된 7.1 동지회원(10여 명)들의 한결같은 얘기여서 현재까지 증언으론 신빙성이 가장 높다.
3. 그러나 여기서부터 양측의 증언이 엇갈린다.
형무소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사상범 처형을 3일간 했다고 증언한 반면 현장 총살집행책임자였던 홍 씨는 지난 9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총살) 집행은 10여 일간에 걸쳐 진행됐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홍 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한 삼일은 그렇게 했으나 다음부턴 여유가 없었어요. 대전시내 소방대원들 50-60명이 3,4개씩 구덩이를 파요. 길이가 5미터, 넓이가 3미터쯤 되는 구덩이를 파놓으면 트럭이 그 앞에까지 와서 죄수들을 쏟아부었지요. 죄수들을 구덩이 앞에 눕혀놓고 M-1으로 대각선으로 사격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나무에다 묶어놓고 눈을 가린 채 쐈으나 나중에는 산 사람을 앉히거나 눕혀놓고 마구 사격을 했다는 얘기다. 다른 목격자의 얘기도 들어보자.
임선기(77. 대전 산내 낭월동)씨.
이곳 토박이인 임 씨는“아침때부터 해거름까지 총소리가 쾅쾅 났는데 약 일주일 간 계속됐다. 막판 이틀 동안은 한 밤중에도 총소리가 들렀다”라고 당시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송민용(66. 대전 동구 구도동)씨
송민용 씨도 “ 당시 일주일 넘게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골링이(골령골)로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당시 “시체옆에서 스님들의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 하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규희(62, 당시 국민학교 5학년, 대전 거주)씨는 “적어도 열흘쯤 재소자를 옮기는 트럭 행렬이 계속됐다” 주장한다.
이처럼 형무소 직원들과 현장 목격자들의 주장이 다른 것은 왜일까? 변홍명 씨는 지난 9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 대전형무소학살사건이 끝난 뒤 3일 동안 대전보도연맹원과 좌익불순분자라는 죄목(?)으로 연행해 온 5백여 명을 같은 방법으로 계속 처형했다”
즉 형무소 사상범 외에도 군. 경이 후퇴를 시작한 7월 14일-16일 막판까지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골령골에서의 처형이 계속됐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6.25 초기 북한 유격대 중대장이었던 김남식 씨는 9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군. 경이 후퇴하기 직전 목격한 대전 산내학살현장에 대해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시체는 온통 시커멓게 그슬린 데다가 퉁퉁 부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김 씨를 만났던 노가원(46)씨는 이에 대해 “변 씨가 학살책임자인 때는 시체를 땅속에 묻었지만 그 후에는 땅속에 묻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 휘발유로 불태웠다고 추측된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실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남한 주요 도시에서는 과거 좌익 정당. 단체에 관여했던 사람들, 정부수립 후 전향의 뜻을 밝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검속해 군. 경이 후퇴하기 직전 처형한 참극이 벌어졌다.
미국방부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전인 99년 11월부터 진상조사 활동을 벌여온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진상조사반에도 전쟁발발 직후 군. 경에 의해 끌려간 후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송영길 씨는 아버지 송준호 씨(당시32세)가 당시 골령골에서 처형된 것이 분명하다며 진상조사단을 찾아왔다. 6.25 직전, 강원도 부근에서 광산사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는 전쟁이 나자 서울 대고모집에 들러 대전집으로 내려간다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이 아닌 골령골 학장현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골령골에서 시체 구덩이를 파는 부역일을 했던 같은 마을(산내면 옥계리) 구장집 머슴이 총살현장에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 아버지 송준호 씨는 피살되기 직전 구장(이장) 집 머슴에게 가족들이 걱정할 것을 우려한 듯 “내가 여기서 죽었다는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피해신고만도 부여, 논산, 청양, 영동 등 각지에서 이미 20여 건이 접수됐다.
학살 이후 몇 년 동안 골령골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오고 큰 비가 올 때마다 유골이 떠내려왔다고 한다. 주민 임선기(77, 낭월동 거주)씨는 “ 인민군이 대전에 왔다고 해 구도리로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 송장 썩는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해 코를 싸매고 다녔고 어디랄 것도 없이 골짜기 전체가 무덤으로 변해 있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임 씨는 또 “ 한동안 비만 오면 핏물이 개울로 떠내려와 물색깔이 적갈색 빛을 띠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80년 때까지 장마 때마다 많은 유골이 떠내려왔고 불치병 약재로 쓴다며 20여 년이 넘게 사체를 발굴해 갔다는 얘기도 쏟아져 나왔다.
4. 그렇다면 백주 대낮에 자행된 이 같은 잔혹한 살인행위를 지시한 학살의 책임자는 누구일까?
이와 관련 먼저 이 사건은 예상과는 달리 매우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 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미리 부역자를 동원, 이틀 전부터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팠고 현장에는 ‘미군’과 ‘사회유지’들까지 와 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휘계통을 모두 거쳐 이뤄진 사건임을 추정하게 한다.
최근 비밀이 해제, 공개된 미국 문서에도 “처형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상층부로부터 내려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최상층부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당시 국무총리를 겸하고 있던 신성모 국방장관, 또는 국무회의 등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당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부대장이었던 이준영(77)씨는 “학살사건 1주일 전인 7월 1일 이계동이란 부하직원이 ‘검사장한테 전화가 왔는데 북한군이 대전을 공습한다고 하니 공산주의자인 정치범을 처리하라’고 말했다”며 “이 헛소문으로 교도소장과 직원들이 도망가고 죄수들의 소요가 일어났으나 17 연대와 충남도경의 병력으로 안정을 되찾았다”라고 말했다.
7월 1일 대전교도소 소요사건에 대해 이선근 국방부 정훈국장 등이 「민족의 증언(중앙일보사 간, 1983)」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을 떠난 뒤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신성모 국방장관과 백성욱 내무부장관 등 몇몇 각료와 국무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정훈국장이었던 이선근 대령은 “문제는 대전형무소에 있는 2천여 명의 적색수감자들”이라며 “이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으니 막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날 회의에서 정치범에 대한 처형을 논의했을 것이라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비슷한 시기 군. 경이 포항 앞바다에서 재소자 200여 명을 함상에서 처형. 수장한 사건의 명령을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이 내렸다는 당시 해군 지역사령관의 증언은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준영 씨의 증언에 따라 당시 군대에서 요청한 정치범의 신병인도는 법무부장관의 허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된 상태다.
미국의 역할도 여전히 의문이다. 92년 2월 본지에 증언한 당시 경찰관이었던 변홍명 씨의 진술이 주목된다. 그는 “총살 집행장에는 경비헌병이 능선을 둘러 서 있었고 ‘미군’과 ‘사회유지’들도 포진해 있었다”라고 진술했다. 변 씨의 진술은 뒤늦게 해제된 미국의 사진에 의해 ‘사실’ 임이 드러났다.
사진 속에는 학살 현장을 태연히 지켜보는 미군고급장교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배재대 강창일 교수(제주 4.3문제연구소 전 소장)는 “당시 실질적인 군사작전권을 행사하던 미군의 묵인. 동의 없이 대량학살이 가능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5.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 관련 기관 어디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공식문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민간단체가 전쟁당시 대전형무소에 복역 중이던300명의 4.3 사건 관련 ‘수형인 명부’를 찾아냈음에도 정작 정부는 단 한 명의 수형자 명부도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대전교도소도 법무부도 국방부, 충남경찰청도 관련 자료가 없다는 답변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산내학살 진상조사반 정현태(33)씨는 “누가, 몇 명이 죽었는지 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며 “ 더 늦기 전에 정부가 나서 자료조사와 현장조사, 증언 청취 등의 작업에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 씨는 또 “이 사건은 제주 4.3과 여순사건, 보도연맹은 물론 우익인사의 집단 처형과도 연관돼 있는 만큼 반드시 정부차원의 규명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실제 군. 경에 의한 끔찍한 골령골 학살 사건은 다시 인민군에 의한 우익인사의 잔혹한 보복학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50년 9월.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 인민군들이 다시 밀리게 되자 퇴각하던 인민군이 1천300여 명의 반공인사들을 일렬로 세워 총살하기도 하고 형무소 우물에 처넣었다. 따라서 어쩌면 골령골 사건은 이후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인민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과 보복이라는 악순환적 양민학살의 도화선이 됐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최초의 집단학살이며 단일지역 최대의 학살이었기 때문이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산내학살 진상조사단 김용우 단장(58, 보문감리교회 목사)은 “ 대전형무소 사건은 좌. 우익을 포함 최소 4천여 명이 희생된 한국전쟁 중 최대비극이며 학살과 보복으로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민족사의 아픔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제주 4.3문제연구소, 여수사회문제연구소, 대전참여연대, 순천참여연대 등이 대전지역 학살사건을 다룰 전국적인 대책위원회의 구성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를 들춰내 상처를 덧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사의 비극적 상흔을 치유하려면 감춰진 역사적 사실을 반드시 밝혀내야 합니다” 김용우 단장의 말이다.
1950년 대전형무소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의 참상은 광적인 이념대립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가를 몸서리 처지게 느끼게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꼭 반세기가 되는 2000년. 새해 벽두에 모습을 드러낸 골령골 학살 사건은 어쩌면 역사가 우리에게 분단의 아픔을 치유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