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대전시와 충남도, 그리고 정치권이 주도하는 '대전·충남 행정통합' 논의가 '속도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불과 몇 개월 만에 거대한 행정 체계 개편을 마무리 짓겠다는 구상이지만, 정작 통합의 주체인 시민은 배제되어 있다는 비판여론이 거셉니다.
지난 1월 19일 열린 '시민사회 변화포럼'에서 제기된 주요 쟁점들을 바탕으로,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속도가 아닌 숙의'인지 짚어보려 합니다.
1. 억지로 열어젖힌 '오염된 기회의 창'
통합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지금이 통합의 '적기'이자 '기회의 창'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정책전문가들의 다수는 지금의 상황은 정상적인 정책 결정 과정이라기보다 정치적 흐름만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오염된 창'에 가깝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킹던(Kingdon)의 다중흐름모형에 따르면, 성공적인 정책은 '문제의 흐름', '정책 대안의 흐름', '정치의 흐름'이 결합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현재 대전·충남 통합은 시·도민들이 이를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는 '문제의 흐름'도, 구체적인 비용 추계나 주민 혜택이 담긴 '정책 대안의 흐름'도 성숙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오직 정치적 일정에 맞춘 하향식 추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2. '규모의 경제'라는 허상과 행정 비효율
통합의 핵심 명분으로 내세우는 '행정 효율성'과 '규모의 경제' 또한 실증적 근거가 부족합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지방정부의 인구가 일정 수준(약 24.4만 명)을 넘어서면 오히려 관리 비용이 급증하고 주민 대응성이 저하되는 '규모의 불경제'가 발생합니다.
실제로 1995년 도농통합이나 2010년 창원시 통합 사례를 분석한 결과, 행정비용 절감 효과는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장기적으로 비용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인구 360만 명의 거대 조직이 탄생할 경우, 의사결정 지연과 행정 경직성으로 인해 주민 삶의 질은 오히려 후퇴할 위험이 큽니다.
3. 통제받지 않는 '슈퍼 단체장'의 탄생
통합이 성사되면 360만 시도민의 인사권과 막대한 예산을 거머쥐는 '슈퍼 단체장'이 탄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 논의에는 이 거대 권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가 전무합니다.
정부가 발표한 인센티브안 역시 조세권 이양과 같은 핵심 자치권은 빠진 채 '예산 따내기' 식 논리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자주재원 확충 없이 중앙정부 지원금에만 의존하는 통합은 지자체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고 중앙정부 예속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4. 대안은 없는가: '설계자'로서의 시민사회와 기능적 협력
이제는 관 주도의 '속도전'을 멈추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숙의의 창'을 열어야 합니다. 포럼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안적 로드맵이 제시되었습니다.
- 시민의회 구성을 통한 숙의
무작위 추출된 시민들이 학습과 토론을 통해 통합의 조건과 비전을 직접 설계할 것을 제안합니다.
- 주민투표의 법제화
통합의 최종 결정권을 주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주민투표 부결 시 특별법이 자동 폐기되는 조항을 명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 지방선거 이후로의 일정 조정
내년 선거에 맞춘 졸속 출범보다는 3~4년의 충분한 준비 기간을 두고 차기 총선 등과 연계해 단체장을 선출하는 방안이 타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 구조적 통합보다 '기능적 협력’
선진국들처럼 무조건적인 행정구역 해체보다는 교통, 산업, 환경 등 문제별로 공동기구를 만들어 협력하는 '다수준 거버넌스'를 먼저 구축할 것을 제안합니다.
특히, 행정통합은 단순히 구역을 합치는 행정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정치적 이해타산에 밀려 시민의 목소리가 지워진 통합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통합하느냐 마느냐"보다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전·충남의 미래를 위해 어떤 절차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세요.